[견밀] 영원한 것

그럼요. 그 아이가 원하는 만큼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 . . 따르릉, 따르르릉. 적막한 집 안에서 알람이 울렸다. 기본 알림음인 채로 한 번도 바꾼 적이 없기에 지겨울 정도로 익숙했다. 천천히 몸을 움직였고, '8시 15분' 알람이라는 글자를 봤음에도 눈을 감았다. 그는 아직도 누군가 - 라기엔 특정한 한 명이 - 가 '설지! 슬슬 일어나서 출근할 준비해야 하지 않아요?' 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에휴." 혼자이니 말을 걸 사람도 없었다. 밀리야 혼자서도 재잘재잘 수다를 떠는 재주가 있지만, 몸도 마음도 딱딱하기 그지없는 그에게는 그랬다. 25분쯤에 느지막히 일어나 이불을 밀어두고, 어제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추리닝 바지와 후드 집업을 걸쳤다. 밀리가 가기 전 각을 잡아 잘..

나를 위해서만 숨을 쉬지 마 . . .릴리아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의 개인사정이니, 나의 소중한 일기에도 적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큼은 꼭 기록해 두어야겠어요. 클라라와 릴리아의 관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복잡했어요. 남의 사정을 지레짐작하는 건 무례한 일이지만, 그건 제가 어렴풋이 예상했던 그 어떤 것도 아니었거든요. 둘은 잔디 위로 장소를 옮겼다. 즐거움이 가라앉아 차분해진 릴리아는 한결 조용해졌고, 밀리는 그가 말이 많든 적든 한결같이 신경을 끄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마치 그는 커다란 행성이어서, 주위에 있는 작은 소행성들을 빙빙 맴돌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 궤도를 어떻게 파고든 걸까? 밀리는 그것 또한 궁금해졌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클라라와 내가 처음 만난..

가끔은 많이 아끼는 만큼 멀어져야 할 때도 있다는 걸. . . . "어디부터 갈까요? 근처를 지나가기만 했지, 와서 놀아보는 건 처음이에요. 클라라는 그렇게 안 생겨서 바다를 별로 안 좋아하니까~" 한껏 심란해진 밀리와 달리 릴리아는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거대한 캐리어를 다시 덤불 안에 넣고, 밀리를 잡아끌어 새하얀 모래사장으로 향했다. 방금, 릴리아는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쪽에 속하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꾸밈없는 말이 날아와도 미소는 여전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요? 내가 밤중에 불러냈을 때 진작에 눈치챘어야지. "저도 한 자유로움 하는데, 릴리아는 못 이기겠네요. 이게 바로 생태계의 법칙인가요? 좋아요." 짧게 한숨을 쉰 밀리는 샌들을 벗어 손에 들었다. 진작에 신발 없이 걷..

변덕스러워서 사랑스러워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릴리아 씨와 함께 본다이 비치에 놀러가기로 한 날이에요. 네. 제가 오해했던 그분이에요. 너무 다정하고 좋은 분이어서, 섣불리 그런 생각을 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어요. 그렇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하긴 해요. 설지도 상상해 봐요! 당신이 누군가와 금세 친해졌는데, 그의 애인이 늦은 밤중에 당신을 불러내는 거예요. 긴장되지 않겠어요? 내 상상력이 너무 과한 거라고는 말하지 말아줘요...! "밀리~! 이쪽이에요. 길 찾기 힘들었죠. 오늘은 잘 부탁해요!"클라라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얼굴 전체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니, 어쩌면 그가 태양신의 둘째 딸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그 옆의 릴리아는 이르게 찾아온..

내일 나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을래요? 분명 재미있을 거야. . . . "오해한 모양이네요. 저는 밀리를 추궁할 생각이 없었어요. 제 말투가 그렇게 무서웠나요?" 밀리는 대답하지 않은 채 웃었다. 그린 듯한 완벽한 미소를 파악한 릴리아는 재차 물었다. 조금 곤란했죠? 안드로이드 간이니 숨길 수도 없었다. 네, 약간요. 그는 표정에서 미소 샘플 12-2를 지우고 진지하게 굴었다. 이 순간, 그는 한국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처음 견설지를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클라라에게 어째서 새로운 동반자가 필요한가요? 당신이 있는데." "필요하게 될 거예요. 내 몸체의 내부 부품은 이미 몇 번이고 교체 과정을 거쳤으니까." 모호한 말이었지만 바로 알아들었다. 안드로이드 간이니 부가 설명은 필요없었다. 실..

어떻게 우리가 영원히 함께할 수 있겠어요? . . . 맹세컨대, 밀리는 시드니에서 한 번도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곳의 거리는 관광객에게 친절했고, 사람들은 안드로이드에게 관대했다. 그 또한 지나치게 낯을 가리거나 수줍어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따라서 밀리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너무 자유로웠던 대가를 한 번에 몰아서 받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다. 눈 앞에는 아름다운 은발의 안드로이드가 앉아서 웃고 있었다. 잘 손질된 몸체, 단아하지만 신경쓴 게 느껴지는 옷차림. 누군가의 사랑으로 이뤄진 결과물이었다. "반가워요, 밀리. 늦은 시간에 갑자기 불러냈는데 응해줘서 고마워요." "천만에요. 저야말로 늦은 시간에 전화드렸는걸요." 사람과 닮게 설계된 안드로이드라고 해서 땀이 나는..

저는 그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아요. 의심하고 싶지 않다는 것에 가깝겠네요.. . . "감동적이야. 이야기의 힘은 정말 위대해." 오페라 하우스에서 걸어나온 밀리는 잠시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숨을 쉬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몸이었지만, 감동을 해소하기 위해 심호흡할 필요가 있었다. 곡선을 그리는 지붕 위에 반사되는 야경의 불빛, 웅성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잠시 감상하고 있었다. 누군가와 이 감동을 나누고 싶은데... 여태까지 인간의 창작물을 접해본 적은 있었지만, 직접 공연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문화생활은 좁은 반경 - 견설지의 인지 반경 - 안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설지는 모르고 내가 아는 것이 늘어가네요. 나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설지에게는 아쉬운 일이겠죠?" 그렇게 중얼거린 밀리..

그는 내게 '별 다를 바 없어' 라고 말해주었는걸요....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예고한 대로 서큘러키에 왔어요. 낯선 장소라 피곤했던 탓일까요? 에너지 소모가 빠르길래, 셔틀에서는 안드로이드 전용 충전석에 앉아서 왔어요. 다들 절 신기하게 보시더라고요. 시드니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한국의 지하철에서도 같은 경험을 했거든요. "혼자예요?"몇 달 전, 대중교통을 타고 조금 멀리 있는 식료품 점에 다녀왔을 때의 이야기다. 천으로 된 쇼핑백 속 아슬아슬하게 집어넣은 사과에 신경을 쓰고 있던 밀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혼자냐니까. 반말로 바뀐 물음이 재차 들려오자 시선이 향했다. 네, 동행인은 없습니다. 예의바르게 답하면 그는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밀리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의..

P. S. 이제서야 약간 당신이 보고 싶어요. . . .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일기를 써요. 원래 일기란 '그날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록하는 수단이란 걸 알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는걸요! 셔틀을 타고 오는 내내 이 생각뿐이었어요. 매일매일 설지에게 전화로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번 여행은 당신을 그리워하기 위함이니 그럴 수는 없어요.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에요. 어때요? 수많은 데이터를 토대로 도출한 결론이에요. 밀리는 퀸 빅토리아 빌딩에서 살짝 헤메이고 있었다. 물론 머릿속에는 이곳의 지도가 쫙 펼쳐져 있었으나, 좀처럼 마음에 드는 가게를 찾지 못한 탓이었다. 여긴 사람이 너무 많네. 여기는 동행인 없이 안드로이드 출입 금지. 여기는 그냥 인테리어가 별로야... 자신이 까다로운..

내가 이곳에서 즐거워하는 만큼, 당신도 잘 지내길 바라요. . . . "우리 비행기 시드니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차례대로 하차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승무원은 굽 있는 구두를 신고 바른 자세와 환한 웃음으로 승객들을 안내했다. 대부분은 장시간의 여행에 지쳐 무표정이었지만, 몇 명은 미소로 화답해주기도 했다. 그 사실에 별 유감은 없었다. 자신의 업무는 승객들을 무사히 하차시킨 뒤 자리를 정돈하는 것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그도 사람인지라, 활짝 웃어준 승객에게 더 친절하게 대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승무원이 약속이라도 한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분홍색과 밝은 푸른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여성은 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