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것 11
나를 위해서만 숨을 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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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아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의 개인사정이니, 나의 소중한 일기에도 적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큼은 꼭 기록해 두어야겠어요. 클라라와 릴리아의 관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복잡했어요. 남의 사정을 지레짐작하는 건 무례한 일이지만, 그건 제가 어렴풋이 예상했던 그 어떤 것도 아니었거든요.
둘은 잔디 위로 장소를 옮겼다. 즐거움이 가라앉아 차분해진 릴리아는 한결 조용해졌고, 밀리는 그가 말이 많든 적든 한결같이 신경을 끄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마치 그는 커다란 행성이어서, 주위에 있는 작은 소행성들을 빙빙 맴돌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 궤도를 어떻게 파고든 걸까? 밀리는 그것 또한 궁금해졌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클라라와 내가 처음 만난 순간? 그거야 밀리도 짐작할 만큼 뻔하니까 그만둘까요."
파란 물결 위로 새하얗게 밀려오는 물거품이 보이면 기억 또한 하나둘씩 쏟아져 내렸다. 노화된 머릿속의 회로를 깨우고, 인위적으로 아름다운 눈동자를 굴렸다. 회상이란 늘 그런 법이었다. 클라라는 나를 이렇게 사랑하게 될 줄 몰랐대요. 밀리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여 공감했다. 꼭 비슷한 경험이 없었더라도, 안드로이드가 아니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발을 담그기 전 수면의 깊이를 착각하곤 한다.
"바보 같지 않나요? 우리는 원래 이렇게 만들어졌는데. 사람을 위해서, 사람에게 이롭도록.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생겼는데."
다정하고 건조하게 굴던 주인의 태도에 점점 물기가 스미기 시작했다.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옆에 슬쩍 와서 도와주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물었다. 그런 게 궁금하세요? 하며 고개를 돌리면 시선에 사로잡힌 듯 멍한 표정을 했다. 원래 이렇게 만들어진 릴리아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슬슬 좋아지는 모양이군. 잘됐어.
"그래도... 늘 사랑받는 건 아니잖아요. 입맛에 맞지 않으면 바꿔버리고 되파는 사람도 종종 있는걸요. 그러니 클라라는..."
"알아요. 그 애에게 있어 내가 특별하다는 걸. 언제든지 바꿔버릴 수 있는 가전제품 취급이 아니에요. 그래서 곤란한 거고."
두 사람이 밀어를 주고받은 지 꽤 지났어도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은 안드로이드며, 기계로 이루어진 몸체의 수명이 다하면 영영 전원이 꺼질 거라는 것을. 하늘에 떠 있는 해를 떨어트리려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제조사인 K사의 부도 소식을 들었을 때, 클라라가 그렇게 참담한 표정을 지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릴리, 봤어? 이제 어쩌면 좋지... 일단 네 몸체에 호환되는 부품을 최대한 사둬야겠어.
"우리는 그 날 처음으로 싸웠어요. '그럴 필요까지 있어?' 라고 말하니까, 말 그대로 펄쩍 뛰더라고요."
삶에 애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클라라를 사랑했고, 이 삶을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단지 슬퍼하거나 안타까울 일 없이 살고 싶었을 뿐이다. 날 바꾸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내 인격을 복사해서 다른 몸체에 붙여넣고, 영원히 옆에 둘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그게 싫어. 하지만 그건 잘 되지 않았다. 클라라가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터트린 순간, 단단한 심장에도 흠집이 났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서로 타협점을 찾는 중이에요. 나는 클라라가 날 보수하는 걸 막지 않고, 클라라는 내 인격을 복사하지 않죠. 하지만 그 애는 점점 시들어 가요. 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밀리도 싫잖아요? 그런 건.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럼... 릴리아는, 더 이상 클라라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싶지 않아서 멀어지려는 건가요? 그 말에는 웃음을 내쉬고 고개를 흔들어 부정했다. 이렇게까지 속마음을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지만, 눈앞의 귀여운 안드로이드는 말하기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릴리아 또한 그에게 약간의 질투를 느끼고 있었던 셈이다.
"일단 밥부터 먹을까요? 벌써 점심때예요. 우리는 굳이 음식물을 섭취할 필요는 없지만, 기분을 다시 끌어올리고 싶어서요."
있잖아요. 내가 당신을 정말 떠나고 싶다 말한다면, 당신은 그 말을 받아들여 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