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것 12

2024. 11. 18. 22:46

 

그럼요. 그 아이가 원하는 만큼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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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따르르릉. 적막한 집 안에서 알람이 울렸다. 기본 알림음인 채로 한 번도 바꾼 적이 없기에 지겨울 정도로 익숙했다. 천천히 몸을 움직였고, '8시 15분' 알람이라는 글자를 봤음에도 눈을 감았다. 그는 아직도 누군가 - 라기엔 특정한 한 명이 - 가 '설지! 슬슬 일어나서 출근할 준비해야 하지 않아요?' 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에휴."

 

혼자이니 말을 걸 사람도 없었다. 밀리야 혼자서도 재잘재잘 수다를 떠는 재주가 있지만, 몸도 마음도 딱딱하기 그지없는 그에게는 그랬다. 25분쯤에 느지막히 일어나 이불을 밀어두고, 어제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추리닝 바지와 후드 집업을 걸쳤다. 밀리가 가기 전 각을 잡아 잘 다려둔 셔츠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오늘은 회의가 있는 날이잖아요! 좀 더 깔끔하게 입고 가는 게 좋겠어요. 자, 옷 골라줄게요! 게으른 행동에서 얻을 수 있는 건 환청으로 들려오는 타박이었다. 

 

그가 집안을 어질러 놓는 성격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물건은 있던 자리에 두는 편이었고, 청소기도 주말마다 꼬박꼬박 돌렸다. 하지만 상시 거주하는 누군가가 치워주던 때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가기 전에...환기 한 번 시켜야겠네. 밀리는 집에 공기가 고여있는 걸 안 좋아해. 사적 언어를 통해 자신을 통제하지 않으면 움직일 마음이 나지 않았다. 밀리가 자신을 그렇게 길들인 건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글러먹은 자식이었는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 안녕. ...왜? 아니다, 그런 거. 잔말 말고 오늘 있을 회의나 준비해."

 

회사에서도 그는 여전히 저기압이었다. 설지 선배님, 요즘 무슨 일 있었대요? 예민한 귀가 쫑긋했지만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왜, 그 안드로이드 가족 있잖아. 밀리라고... 길게 여행을 갔대. 그래서 외로우신가 봐. 사내 담화의 소잿거리가 되는 일은 사양이었지만, 그걸 말리러 갈 힘조차도 없었다. 이빨 빠진 맹견처럼 구는 견설지에게 사람들은 걱정과 염려, 깐족거림을 건넸으며, 견설지는 쭉 옅은 미소로 일관하고는 마지막의 동료에게만 진심어린 딱밤을 건넸다. 아! 견설지!!! 

 

"휴... 됐어. 범인 제압했다. 후방 지원팀 들어와도 돼. 피해자는 이쪽에서 맡았어. 경찰도 곧 온단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안색이 엉망이었다. 보다 못한 동료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말했다. 설지 씨, 나머지는 저희가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보세요. 그리고 이거... 손 안으로 족욕 카페 이용권이 하나 들어왔다. 별 건 아니지만요. 평소에 이것저것 도와주신 답례입니다. 버석하게 말라있던 심장에 다정함 한 방울이 또옥, 하고 떨어졌다. 그제서야 제법 진심어린 웃음이 나왔다. 역시 사람은 남에게 정을 주고, 정을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란 실감도 났다. 

 

"그래. 사양하지 않고 잘 쓸게. 그럼 먼저 가 볼게. 수고들 해." 

 

팀장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굳이 그 이상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손만 가볍게 흔들고 떠난 그는 택시를 잡았고, 눈을 살짝 찌푸리고는 족욕 카페의 주소를 읊었다. 아이고, 거기라면 요금이 꽤 나올 텐데. 괜찮겠어요? 네. 하고 대답하는 사이에 택시는 살짝 후진해 다시 멈췄다. 자, 도착했습니다. 빙긋 웃으며 돌아보는 얼굴에 그만 머쓱한 웃음이 터졌다. 젊은 사람이 정신을 어디에 놓고 다니는 거예요! 자, 내려요. 내가 엄청 빨리 왔죠? 

 

허전한 마음이 조금은 채워진 채로 카페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하지만 가벼워졌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웃으면서 돌아보는 알바생의 머리가 분홍색이라는 것으로도 마음이 쿵, 하고 떨어졌다. 단발에, 귀여운 얼굴. 하지만 고양이를 닮은 인상. 설지가 뻣뻣하게 굳어있자 알바생은 싹싹하게도 그의 앞으로 다가와 메뉴판을 들이밀고 설명을 시작했다. 

 

"족욕 카페는 처음이신가요? 안내 도와드릴게요~ 여기 보시면 기본 코스는 족욕만 하실 수 있고요, 거기에 어깨 마사지나 다리 마사지를 추가하실 수 있어요."

 

얄궂다고 생각했다. 내가 장미를 두고 온 게 아니라 장미가 날 두고 간 건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토록 너를 떠올리게 만든다.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상기할수록 네가 그립다.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는 거지, 널 사랑하는 날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서... 네, 그럼 어깨랑 다리까지 추가해서 부탁드려요. 음료는 아이스티로요.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간에 꾹 눌러 참는 것뿐이었다. 

 

심란한 마음과 별개로 마사지는 좋았다. 가슴팍에 달려있는 명찰을 통해 그가 '지나'라는 이름을 가졌음을 알게 되었다. 붙임성 좋은 직원과의 대화가 그렇듯, 견설지는 지나의 경력과 출신 - 주인을 도와 족욕 카페에서 일하고 있었다 - 그리고 자신의 승모근이 얼마나 뭉쳤는지를 알게 되었으며, 지나는 견설지가 현재 끌어안고 있는 고민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안색이 좀 안 좋으셨군요? 딱 봐도 피곤해 보이시더라고요. 아직까지도 연락 한 통 없다니, 좀 너무하네요. 외로울 주인 생각은 안 하나?"

 

밀리와 만난 적 없는 그가 설지의 편을 들어주는 건 당연했다.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화 같은 건 나지 않았다. 그는 종아리를 꾹꾹 누르는 손길에 움찔하며 부연설명을 곁들였다. 그런 건 아니에요. 사전에 약속했거든요. 떨어져 있는 시간에 익숙해지고 싶다고 했어요. 그 말에 지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에 왜 익숙해져야 하는데요? 어차피 우리는 계속 주인님과 함께하는 존재인데. 

 

"본인의 감정을 증명하고 싶댔어요. 그걸 위한...과정인가 봐요. 자세한 건 설명해주지 않아서 모르지만."

 

견설지는 이번에도 지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원래 우리는 서로를 전부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지나는 그제서야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렸다. 본래 업무에 다시 집중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그럴 만 하죠. 저도 한때 고민한 적이 있거든요. 내가 진짜 주인님을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프로그래밍 되어서 그런 것 뿐인지. 

 

"저는 상관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어느 쪽이든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이렇게 생생하니까, 진짜든 가짜든 별로 상관없는 거 아닐까 하고요. 하지만 그 밀리라는 분은 좀 더 고민이 필요한가 봐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같은 안드로이드로서 하나 장담할 수 있는 게 있어요. 설지 씨가 그분을 생각하는 만큼, 그분도 설지 씨를 생각하고 계실 거예요. 방긋 웃는 얼굴 또한 다정함이었다. 다만 좀 더 익숙한 것이었다. 항상 그가 집에서, 출근하기 전에, 퇴근한 후에 마주하던 그것. 가짜여도 좋으니 더할 나위 없이 기껍던 그것. 그는 자신의 장미와 닮은 장미를 보면서 가슴이 찌르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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