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것 15
항상 당신을 사랑하는 밀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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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를 끝낸 후에는 더 그라운드 오브 알렉산드리아 안의 정원에서 산책을 했어요. 릴리아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음, 설지에게는 갈수록 비밀만 많아지네요. 그래도 당신이 바란다면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고, 뜻밖의 만남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솔직히 말해 봐. 방금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런 표정을 한 건데?"
30분간의 공방, 그리고 3분간의 침묵이 뒤를 이었다. 패배가 확실해져 온 밀리는 눈을 질끈 감고 용기를 끌어모았다. 자신의 못난 부분을 인정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사실은... 아, 그래.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었다. ...그래서 설지를 생각하니까 돌연 불안해졌고, 또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한심해졌어요. 잠시 떠나겠다고 한 건 나였는데! 릴리아가 꼭 닫힌 금고라면 밀리는 살짝만 비틀어도 열리는 저금통이었다.
"괜찮아. 그런 생각 할 수 있지. 마음이 식어서 떠난 게 아니잖아? 하지만 좀 미련하다고 생각하긴 해."
"아, 알고 있어요. 저도 알아요! 눈을 뜬 이후로 이런 고민은 처음이어서 그래요. 좀 이해해 주세요..."
물론 이해하지. 이해하고말고. 릴리아는 낮게 중얼거렸다. 아마도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안드로이드가 이런 존재론적 고민을 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기계로 만들어지고 0과 1로 사고하는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불러도 되는가. 내게 '사랑하라' 고 입력된 저 인간을, 나는 정말 사랑하는 것이 맞는가... 그 과정에서 어떤 안드로이드는 인간을 싫어하게 되기도, 스스로 전원을 꺼 버리기도 했다. 릴리아는 전선처럼 촘촘히 얽힌 담쟁이덩굴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검증된 적 없는 가설이지만, 어쩌면 이건 우리가 사람다워지는 과정일지도 몰라. 스스로의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하려 드는 것."
"인간들 또한 그런 과정을 거쳐왔으니 틀린 말은 아니겠죠. 데카르트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말하곤 했잖아요."
그렇다면 이건 우리들에게 주어진 논제예요. 어떤 기준을 두어야 우리가 입력된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닌, '생각한다' 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옛 철학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옛날로 돌아간 듯한 풍경의 상가를 거닐었다. 입이 마를 일은 없지만 레모네이드를 한 잔씩 사서 손에 들었고, 다리가 피곤할 일은 없지만 자연스럽게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이건 확실히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맞아. 그들과 어울리기에 자연스럽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지. 어느새 해는 부드러운 주황색을 그리며 저물어 가고 있었다.
"벌써 해가 저무네요. 슬슬 클라라가 마중나올 시간인데요? ...정말 저랑 릴리아를 바꿔치기 할 거예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요. 이만큼 이야기했으니, 내가 당신을 이해한다는 걸 알게 됐잖아요. "
분명 클라라와도 이렇게 대화할 수 있을 거예요. 릴리아는 설핏 웃고는 고개만 흔들었다. 그가 사랑하는 인간은 생각보다 고집 세게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어서, 최근 한 달간은 정말 집 밖에도 나가질 못했다. 그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는 자신에게도 기가 막혔다. 그래서 꽃향기가 나는 바람이 불어온 김에 결심한 것이다. 여기에 몸을 맡기고 한 번 더 자유로워지길 소망하고, 사랑하는 인간 또한 행복해지길 기원했다.
"하지만 일방적인 바꿔치기는 좀 생각해 보려고. 여러모로 알아보고 싶은 것도 생겼고... 밀리의 소중한 사람이 곤란할 것 같기도 - 이 대목에서 밀리는 '그럼 저는요?' 하고 물어보고 싶은 것을 삼켰다 - 하고. 그래서 말인데, 이런 방법은 어때?"
릴리아는 밀리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하고 속삭였다. 가만히 듣던 단정한 눈썹이 움찔, 하고 휘었다가 가라앉고, 이내 축 늘어져 항복의 의사를 전했다. 여전히 황당무계하고 놀라운 계획이었지만, 적어도 충동성이 강하게 느껴지던 예전보다는 나은 감이 있었다. 정말 많이 고민하셨군요. 알아준 것이 기쁘다는 듯 릴리아가 환하게 웃었다. 역시 미인의 미소는 거절할 수 없었고, 릴리아의 부탁은 외면할 수 없었다.
"알았어요. ...일단, 클라라가 기다릴 테니까 돌아가요. 제 출국일은 이틀 뒤라고요. 그때까지는 얌전히 지내기로 약속해 주세요!"
"얌전히. 라... 내가 제일 잘 하는 거란다. 고작 이틀을 더 못 참겠니? 돌아가기 전까지 나와 많이 어울려 다니겠다고 약속해."
두 개의 새끼손가락이 두 개의 약속을 가지고 얽혔다. 릴리아는 여전히 환하게 웃었고, 밀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 웃었다. 세 사람이 이틀 뒤 - 밀리는 그 전까지 릴리아와 정말 꼭 붙어 있었다 - 공항에 도착하고, 클라라가 작별 선물을 고르느라 면세점에서 한눈을 파는 사이 밀리는 클라라에게 비행기 티켓을 건넸다. 기분좋게 밀리와 수다를 떨던 클라라가 위화감을 눈치챘을 때에는 이미 비행기가 이륙한 뒤였다.
일기장을 통해 소개할게요. 이 사람은 릴리아라고 해요. 나를 대신해서 설지와 잠시간 한국에서 지낼,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안드로이드예요. 잘 대해줬으면 좋겠어요. 릴리아는 변덕스럽지만 매력적이고,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든요... ... 나보다 더 좋아하면 안 돼요. 알겠죠? 꼭이에요! 곧 클라라와 함께 갈 테니까, 친하게 지내되 한 눈은 팔지 말고 기다려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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