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것 16

2024. 11. 22. 08:24

 
내가 정신 나가는 꼴이라도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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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설지는 자신의 적응력에 넌더리가 났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울고불고 난리를 치다가 밥도 좀 안 들어가야 하는데, 오늘도 삼시세끼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먹고 만 탓이었다. 간장이랑 식초 넣어서 추가로 간 하니까 맛있네. 닭고기를 입에 넣은 채 비어있는 앞자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허하고 쓸쓸한 감정은 분명 있었다. 자신이 언제 돌아오지도 알려주지 않는, 그리하여 기다림에 기약을 없앤 밀리의 탓이었다. 잠시 고독을 음미하고 있자면 벨소리로 바꿔둔 휴대폰이 또롱. 하고 울렸다. 
 
'설지. 혹시 지금 공항으로 마중을 나와 줄 수 있어요? 데리러 와 주면 고맙겠어요. 물론 다른 약속이 있으면 안... ...'
 
전부 읽어보기도 전에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었고, 그는 오래 기다린 후 고기를 받은 맹견처럼 반응했다. 식사를 다 마치고자 하는 한국인의 본능을 외면하고, 먹던 것을 대충 덮어 놓고는 급하게 양치질을 하며 겉옷을 찾아 입었다. 그는 자신의 조급함에도 넌더리가 나던 참이었다. 원래 이렇게 뭔가를 서두르는 사람이 아닌데, 밀리 앞에서만큼은 자신의 그 모든 행동 패턴이 바뀌어 버렸다. 이런 구질구질한 행동을 '유일'이라고 부르기에는 빛이 바래는 느낌이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알겠어. 지금 갈게. 공항까지는 15분 정도 걸릴 거야.'
 
'즐거운 여행 보냈어?' 라고 덧붙이려다가 지웠다. 어차피 밀리는 지금 한국에 있고, 그런 것들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천천히 물어보면 될 테니까. 견설지는 나름 여유있게 - 다른 사람들 눈에는 조금 조급하게 - 공항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밀리는 자신이 어느 비행기를 탔는지도, 언제 출구에서 나오는지도 알려주지 않았기에 그것을 물어보려고 휴대폰을 들었다. 그 손을 붙잡은 건 훨씬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었다.
 
"당신이 설지? 반가워요.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네요."
 
아름답지만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었다. 숨길 생각도 없이 동공에 띄운 타원형 안광을 통해 그가 안드로이드라는 것은 알았지만, 자신의 밀리는 아니었기에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아, 네. 저를 아시나요? 죄송하지만 지금은 좀 바빠서... 안드로이드는 그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얇은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 당신이 찾는 사람이 나를 통해서 보내는 거예요. 읽어봐요. 
 
견설지는 안드로이드의 말이라면 그가 누구든, 일단 한 번은 들어주는 편이었다. 이 세상이 기계로 이루어진 사람들에게 좀 더 친절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고, 그것은 자신부터 실천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기치는 거면 가만두지 않겠어. 결심하며 첫 장을 넘기면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신이 이렇게 권모술수에 약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닐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점점 일기의 내용이 머리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지금쯤 릴리아를 만났겠죠? 놀라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우리는 사흘 뒤에 귀국할 거예요.'
 
확인사살하는 문자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눈 앞의 릴리아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연신 방긋방긋 웃고 있었고, 견설지는 손을 덜덜 떨다 하늘을 보고, 땅을 봤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밀리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까. 혹시 무슨 변고라도 당해서 이러는 건 아니냐. 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진정해요. 받아들이기 힘들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으니, 조금 더 기다려 줄게요. 릴리아의 말 몇 마디와 국제 통화 - 밀리와 모르는 여성과의 - 를 거치고 나서야 그는 완전히 납득했다. 그리고 참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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