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것 19

2024. 11. 25. 22:10

 
난 항상 이상한 사람이었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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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공항, 네 여자는 서로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을 느끼며 가만히 서 있었다.
먼저 클라라. 저 멀리에서 릴리아가 보임과 동시에 표정이 확 밝아졌던 그는, 릴리아가 팔짱을 낀 상대를 보자마자 축 하고 시무룩해졌다. ...저 사람이 말로만 듣던 견설지? 나보다 키가 크네. 체격도 좋고... 날카로운 눈매에, 잘생겼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돌연 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릴리아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잖아?!
 
다음으로 밀리. 그는 옆에 서 있는 클라라가 붉으락푸르락 하는 것을 보며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질투는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막론하고 존재했으며, 지난 이틀 동안 상상 속에서만 그를 괴롭히던 광경이 현실이 되었으니 말이다. 역시 잘 어울리네. 설지는 강한 인상이어서, 저런 호리호리한 미인과 얼굴 합이 잘 맞아. ...나도 참 못됐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이런 생각이나 하고...
 
견설지라고 다를 건 없었다. 밀리가 클라라를 달래며 친근한 듯 토닥이는 모습을 보자마자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항상 모두에게 친절하게 구는 밀리였지만, 지금의 행동에서는 그것 이상의 애정이 느껴졌다. 밀리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 예민한 그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앞에서 뭘 하는 거지? 아냐, 진정해. 밀리에게 친구가 생기는 건 좋은 일이잖아. 근데 원래 친구끼리 손을 잡나? 응? 호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은 유교의 나라라서 그런 건 - 
 
설지, 그러다 내 팔 관절이 빠지겠어. 힘 좀 풀지 그래? 여기서 유일하게 즐거운 건 릴리아 혼자뿐이었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세상 모든 것에 미련이 없었고, 지금 이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질투니 분노니 하는 추악한 감정들에서 자유로운 채로 관찰만 할 수 있었다. 클라라, 울 것 같네. 하지만 밀리가 달래주겠지? 눈물이라도 닦아주면 설지의 반응이 볼 만 하겠어. 아, 역시 한국에 오겠다고 결심하길 잘 했다. 
 
"그, 저기... 네 분, 재회하시는 와중에 실례합니다만... 슬슬 소개를 드려도 될까요...?"
 
그리고 한 걸음 뒤에는 손을 모은 채 쩔쩔매는 제이드가 있었다. 얼마 전 만났던 귀여운 안드로이드가 SNS로 연락을 해 왔을 때는 마냥 좋았다. '안드로이드의 정신병리 증상에 대해 상담'을 해 달라길래 자신있게 응했고, 제 능력을 발휘해 점수를 딸 생각에 신나기까지 했던 것 같다. 그 결과로 대한민국 행 비행기를 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프로페셔널함은 여전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안드로이드 권리 단체에서 객원 상담사로 근무하고 있는 제이드 바튼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릴리아 카델 님의 상담을 의뢰받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네 여자는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릴리아는 눈만 깜빡거리다가 설명해 달라는 듯 클라라를 봤고, 설지는 멍하니 있다가 덩달아 밀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우선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할까요? 방으로 된 단체실이 있는 식당을 예약해 뒀거든요. 수습하는 것은 밀리였고, 약간 쩔쩔매며 시선을 피하는 것은 클라라였다. 손발이 잘 맞는 모습에 릴리아는 다시 방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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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원래의 짝꿍을 찾아간 뒤 분위기는 놀랄 정도로 평화로워졌다. 클라라는 릴리아에게 매달려 어리광을 부렸으며, 견설지는 담담한 척 밀리의 어깨를 강하게 감쌌다. 아, 외로워. 홀로 상석에 앉게 된 제이드는 스스로의 팔을 꼬옥 안아주었다. 그래서, 상담이라는 건 어떤 거죠? 클라라와 밀리가 의뢰한 건가요? 자신에게 날아든 질문에는 고개를 들고 진지한 얼굴을 했다. 과연 그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았다. 
 
"네. 그렇습니다. 기분 나빠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지만, 릴리아 님에 대한 정보는 두 분께 전달받은 바 있습니다. K사에서 생산되셨다고요."
 
"맞는 사실인데 기분 나빠할 게 있나요? 맞아요. 2006년에 K사에서 만들어졌어요. 거기에 뭔가 문제가 있나요?"
 
제이드는 가방을 뒤적여 자료를 꺼내고, 모두가 볼 수 있게 식탁 위에 펼쳤다. 현재 저희가 K사 안드로이드에 대해 실시한 실태조사 결과보고서입니다. 이미 망한 회사이니만큼 그 수가 적은 것은 당연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각 개체가 기동을 멈춘 방식이었다. 스스로 두뇌 회로를 끊음. 옥상에서 뛰어내림. 부품 노화를 숨김... 릴리아는 그 사실마저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읽어나갔다. 
 
"관련 논문을 읽어본 바 있어요. K사가 새로운 안드로이드를 구매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몸체의 내구도를 낮춘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니, 안드로이드의 인격 형성 또한 비슷한 수를 썼을 가능성이 있다고요. 하지만 전 신중하고 싶어요. 가설의 영향을 받은 확증 편향일 가능성은 없나요?"
 
"저희 또한 신중에 신중을 기해 자료를 찾았습니다. 모집단 형성도 최대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애썼고요. 그 결과가 이것입니다. 거기에 개개인의 심리평가 결과까지 고려하면..."
 
"K사 안드로이드가 특징적으로 보이는 이상한 증상이 있다. 이건가요? 그리고 거기에 나 또한 포함되고?"
 
열심히 논의하던 클라라와 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릴리아는 그 말을 해 놓고도 평온했다. 조금 눈썹을 올렸다가, 시선을 데굴 굴렸다가, 부드러운 웃음을 보였다. 그래서 뭐가 어떻냐는 듯한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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