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임에서 빛으로, 동경에서 존경으로.
1. 앨리샤 클라인이 트레센 학원을 졸업한 지 1년하고 4개월 만의 일이었다.
흔한 일이었다. 1등이 아니면 빛나지 못하는 레이스의 세계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는 실력의 한계를 받아들여 조용히 졸업했고, 바로 취직을 준비한 끝에 일자리를 얻었다. 레이스와 관계없는 인테리어 회사의 회계사 자리였다. 그의 하루하루가 치열하지 않게 바뀌었다 한들, 우마무스메는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서로 겨루며 자신의 이름을, 목표를, 존재를 드높이고자 했다. 그 마음만은 잊을 리가 없었다.
"앨리샤. 잘 지내니? 취직했다던 회사에는 잘 적응했고? 언제 한 번 놀러오렴. 새로 지도하게 된 아이도 소개해 줄게."
전 트레이너 선생님은 다정한 분이다. 입상하는 것도 힘들던 앨리샤를 기꺼이 스카우트해 주고, 3년간 정성을 다해 지도해 주신 분의 말씀은 각별했다. 네, 그럼요. 조만간 찾아뵐게요. 감사해요. 앨리샤는 특별히 쓰일 일 없었던 연차 휴가를 냈다. 오랜만에 면접용 정장을 입고, 무난한 간식거리를 손에 든 채 트레센 학원으로 향했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안심이구나. 이 뒤에 일정이 있니? 괜찮다면 학생들을 만나러 가지 않을래?"
선배인 네가 무언가 조언을 해 주면, 그 아이들도 분명 좋아하겠지. 존경하는 은사와의 대화로 마음이 따뜻해진 것도 잠시였다. 앨리샤는 가만히 미소지으며 그 말을 부정했다. 분명 뛰어난 각질을 지닌 아이들이었다. TV 방송과 SNS에서 오랜만에 '회색 털의 전설'이 나타났다며 연일 화제였기에 알고 있었다. 앞으로 거물로 자라날 우마무스메에게 무엇을 쥐어짜 조언을 건넬 수 있을까. 그로서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잔디가 고르게 깔린 트랙 위로는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더없이 익숙했으나 이제는 조금 낯설어진 그곳에서 달리고 있는 우마무스메가 있었다. 군데군데 풀물이 들어있는 운동복, 연습량을 증명하듯 더러워진 운동화. 그에 비례하여 날카롭게 갈고닦은 달리기가 눈에 들어왔다. 훈련받았던 경험이 있는 만큼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정말 주니어급이 맞나요? 트레이너는 미소지으며 부정하지 않았다. 정말 뛰어나지. 성실하고 말이야. 그래서 네가 생각났단다.
"저 애도 요령 부릴 줄을 몰라. 그건 큰 장점이지만, 마음이 꺾였을 때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법이지. 그럴 때 의지할 수 있는 멘토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꼭 그럴게요. 시종일관 잔잔하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땅에 굴러다니는 별이라 한들, 하늘 위에서 반짝이던 마음을 잊을 리 없었다. 그는 다시금 닐레 켈러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땀방울이 흐르는 진지한 얼굴은 코너를 돌아 최종 직선으로 달려갈 때 차차 미소로 바뀌었다. 그렇게 달렸으면서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는 환한 미소가 앨리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닐레, 기록 경신이야! 대단한데? 완주하고 나서도 꼿꼿이 서 있다가, 옆에서 타임을 재 주던 우마무스메가 외치고 나서야 주저앉았다.
앨리샤 클라인은 재빨리 물병과 수건을 집어든 채 펜스를 뛰어넘었다. 잠시 실례 좀 할게요! 뒤늦게 양해를 구한 뒤 트랙으로 걸어갔다. 주변의 우마무스메는 기행을 벌인 앨리샤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얼굴이 화끈해졌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중요한 결정이라면 용기를 낼 줄도 알아야 했다. 앨리샤는 닐레에게 손을 내밀며 - 나름대로 큰 목소리로 - 외쳤다.
"안녕하세요. 저는 앨리샤 클라인이라고 해요. 닐레 켈러, 당신의 팬이 되었어요!"
2. 1번 인기였던 닐레 켈러는 아쉽게도 8착에 그쳤습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망막을 스치고 지나간 빛이 너무 눈부셔서, 화끈거릴 정도로 아팠다. 1착을 거머쥔 자신의 라이벌에게 환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이 부족했을까. 노력이, 훈련량이? 그것도 아니면 나의 각오가? 떨리는 근육에게 억지를 써서 힘을 냈다. 소란스러운 관중석의 1열에 보여야 할 모습이 없었다. 내가 너만큼 올곧은 마음이 아니라서? 억측이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멋진 달리기였어. 축하해."
내미는 손이 떨렸지만 표정에는 드러나지 않았다. 약한 모습은 들키고 싶지 않았고, 언제까지나 강한 '닐레 켈러'로 있고 싶었다. 그렇게 고집하고 몰아붙여 도달한 끝이 이런 것이라면 분명 아무에게도 불평할 수 없으리라. 자신에게조차도. 한심하네. 정말. 그는 자기변명을 허용하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신랄한 평가를 내렸다.
아무도 없는 지하통로를 천천히 걸었다. 다들 그 '닐레 켈러'의 순위가 의아하다며 떠들어댔다. 이번에는 컨디션이 안 좋았다던가? 그럴 수 있지. 바꿔 말하자면, 그는 왕관의 마땅한 주인으로서 거론되고 있었다. 아직 클래식 급인데 시니어급들 사이에서 잘 힘냈지. 다음에는 더 잘 할 거야. 입상조차 하지 못했음에도 여론은 나쁘지 않았다. 닐레 켈러의 명성이 견고했기 때문이다.
'알고 있었어. 이렇게 될 거라고.'
속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주 극소수의 관계자만 알았다. 세간에서 말하는 '슬럼프'였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달리는 일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레이스에서 몇 번 지는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수용하지를 못했다. 자신의 실수를 책망하고 반추하며, 만회하기 위해 몇 배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즐거움'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제 닐레에게 달리기는 책임과 의무만으로 가득찬 무언가였다.
'그래서 앨리샤 씨도 가 버린 거겠지. 내 달리기가 반짝인다고 말해주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고 싶어 무작정 강가를 걸었다. 노을이 어른거리는 수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뒤에서 또각이는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닐레. 여기에 있었어요? 무심코 뒤를 돌아보던 회색 눈동자가 커졌다. 그 우마무스메는 자신이 예상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닐레는 옆이 갈라진 하얀색 머메이드 원피스와 짙은 남색의 정장 상의, 하얀색 구두와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쓴 앨리샤를 몰랐다.
"앨리샤 씨. 이건... ...승부복인가요? 현역 때 입었던?"
"맞아요. 아직 맞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들어가더라고요. 어때요? 잘 어울려요?"
어리둥절한 채 네. 라고 대답하면 앨리샤는 웃었다. 닐레의 손을 잡아끌어 강가의 연습 코스로 데려가며 말했다. 그냥 보여주기만 하려고 입은 건 아니에요. 오랜만에 달리기 위해서 입었어요. 구두로 흔적을 내어 출발선을 만들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달릴 준비를 했다. 닐레에게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저랑 승부해요. 거리는 1800m로,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는 조건으로요."
아무리 침울한 상태여도 반색할 수 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평상시에도 훈련을 구경하러 오는 앨리샤에게 종종 '달리기를 보고 싶다'며 요청했던 닐레이다. 그때마다 앨리샤는 변변치 못한 실력인데다, 이미 현역에서 물러난 지 오래라며 이것저것 핑계를 대어 빠져나가곤 했다. 이해는 가지만 내심 아쉬운 마음이 있었기에, 거절할 이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하지만 타이밍이 영 적절하지 않네요. 저는 방금 경기를 끝낸 참인데..."
"그 정도의 페널티도 없이, 내가 어떻게 현역 우마무스메를 상대할 수 있겠어요? 지금이 아니면 닐레를 이길 엄두는 못 내요."
제자리에 서서 준비, 출발! 잽싸게 신호가 떨어졌다. 앞으로 치고 나가는, 저녁노을에 물든 백금발의 뒷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가볍게 땅을 딛은 뒤 몸 전체의 유연성을 이용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지근의 발달이 평균에 못 미치는 우마무스메 특유의 주법이었지만, 앨리샤만의 고유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호흡을 짧게 끊어 조절하는 법, 코너를 돌 때 파고드는 방식. 닐레는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생경하고 또 새로웠다.

'앨리샤 씨는... 이런 방식으로 달리시는구나.'
한편, 앨리샤는 슬슬 한계를 맞이하던 참이었다. 자신의 거리 적성은 1600m 이하였다. 그것도 옛날의 이야기지, 지금은 500m만 뛰어도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등 뒤에서 다가오는 섬찟한 움직임을 느끼고는 실소를 흘렸다. 엄청 오랜만이네. 전력을 다해 달리는 것도, 패배를 직감하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앨리샤가 여기서 닐레를 이길 수 있었다면, 레이스에서 졸업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러므로 앨리샤의 진짜 목적 또한 승리가 아니었다.
"...아, 졌네요. 닐레가 이겼어요. 역시...콜록, 대단..."
그 말을 남기고 풀썩 무너졌다. 갓 태어난 우마무스메처럼 벌벌 떨고 있으면, 한 톤 높아진 닐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뭇 들뜬 듯 했다. 달리기, 정말 좋았어요...! 그 주법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스퍼트 내는 방식이 독특했어요. 호흡 조절은 따로 익히신 거예요? 트레이너 선생님한테 배운 거하고는 또 달라서... 남은 힘을 끌어모아 - 누워있는 꼴이 퍽 초라했지만 - 이것저것 답변해 주고는 겨우 일어나 앉았다. 내 달리기가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닐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웃었다.
"누군가가 달리는 모습만으로도 마음이 벅찰 수 있다는 걸,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요."
저도 지금까지 이런 마음을 받아왔던 걸까요? 앨리샤는 미소지으며 긍정했다. 온 몸이 욱신거렸지만 기분은 매우 좋았다. 역시 우마무스메에게는 백 번의 말보다 한 번의 달리기였다. 맞아요. 나를 포함한 모두가... 닐레의 달리는 모습을 정말 좋아해요. 그건 당신이 완벽해서도, 항상 우승만 해서도 아니에요. 풀물이 든 승부복, 엉망진창으로 흙이 튀어 더러워진 구두. 현재에 충실히 살아가는 자의 훈장을 지닌 채로, 그는 잠시나마 '선배' 가 되었다.
"나는, 우리는. 닐레가 즐겁게 달리는 걸 좋아하는 거예요. 그 모습이 우리를 무대 위로 데려다 놓아요."
3. 나카야마의 직선은 짧습니다. 과연 먼저 나오는 것은 누구일까요!
잔뜩 쏟아졌던 비 때문에 잔디 상태는 엉망이었다. 대부분의 코스가 경사로로 이루어져 있는 나카야마 경기장에 2500m의 거리까지 더해지니, 웬만한 스펙이 아닌 우마무스메들은 벌써 대열의 후반부에 몰려 벅차게 달리고 있었다. 이런, 틀렸어. 해도해도 너무하잖아. 저걸 어떻게 뚫고 나와. 도주나 선행 각질의 아이를 응원하는 사람은 싱글벙글했고, 선입이나 추입 각질의 아이를 응원하는 사람은 주먹을 꽉 쥐었다. 뛰어난 실력자가 아닌 한 뒤집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200m를 남겨두고 닐레 켈러가 앞으로 나옵니다. 철통같던 마킹을 뚫었습니다!"
관중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뭉쳐 뜨겁게 고조되었다. 뭉쳐있던 집단의 사이를 뚫고 뛰쳐나온 '회색 털의 전설' 때문이었다. 자리 싸움으로 체력을 많이 소모했을 텐데도 쭉쭉 뻗어나오는 달리기가 승리의 영광을 예견했다. 닐레, 그대로! 그대로만 달려요!! 하지만 따라잡을 시간이 부족했다. 닐레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선두 그룹이 속도를 올렸기 때문이다. 따라잡을 거리가 충분했다면 좋았겠지만, 벌써 골이 눈 앞이었다.
모두가 불안하게 마음을 졸이는 이 순간, 닐레의 생각만은 그 무엇보다 차분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인데도 등골을 누르는 긴장감이 기분 좋았다. 할 수 있어. 나에게 보이고 있어. 앞으로 달려나가야 할 길이 빛나고 있었다. 점과 점, 선과 선을 이어 만들어진 반짝이는 경로가 보였다. 그걸 따라가기만 하면 되어서, 답지 않은 복잡한 생각은 집어치우고 달렸다. 이길 수 없다던가, 이미 틀렸다던가. 그런 질척이는 사고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발을 내딛었다. 계속 선두를 유지하던 레이첼 클라인, 괴롭지만 버티고 있습니다. 닐레가 따라잡습니다. 따라잡았습니다! 거의 동시에 골인! ... ...
"이긴 것은 닐레! 닐레 켈러입니다!! 연말의 그랑프리, 아리마 기념에서 우승하며 저력을 아낌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얕게 하늘을 가리고 있던 먹구름이 물러났다.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이 닐레의 머리 위로 층층이 내려앉으면, 그는 숨을 들이마신 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와아아아아!! 경기장이 웅웅 울렸다. 사람들은 박진감 넘치는 레이스를 보여준 닐레와 우마무스메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관중석의 1열, 제일 잘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앨리샤 또한 펄쩍펄쩍 뛰며 환호했다. 닐레, 잘 했어요!! 정말 최고예요...!
함성이 한층 더 커졌다. 평소 예의바른 인사만 하고 들어가 버리는 닐레가 관중석 가까이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다들 승리자의 힘 있는 한 마디를 기대했지만, 닐레는 잠시 머뭇거리며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왜 그러지? 뭔가 할 말이 있나 봐. 소란스러움이 잦아들자, 펜스를 넘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사람들의 시선은 닐레가 향하는 방향에 서 있는 우마무스메에게로 모였다.
"제게 눈부시다고 했지요. 저 또한 같은 생각을 했어요. 당신의 달리기를 동경하고, 제게 이토록 용기를 주신 당신을 존경해요."
카메라 또한 관중석에서 얼이 빠져있는 앨리샤의 얼굴을 담았다. 당황해서 허둥지둥거리던 그는 곧 진정하고는 닐레를 향해 미소지었다. 아직도 마음 속 한 구석에는 '그런 말을 듣기에는 너무 못났어' 라는 말이 울려퍼졌다. 겸손으로 열등감을 가리고, 남에게 들킬까 두려워하면서도 부러워하는 앨리샤 클라인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런 방식으로, 누군가의 반짝임을 빛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건 과연 멋진 삶이구나. 닐레가 앨리샤가 있는 뱡향으로 손을 쭉 뻗었다.
"앨리샤, 나 또한 당신의 팬이 되었어요. 악수해 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