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밀] 영원한 것

영원한 것 21(완)

김다고다 2024. 11. 27. 21:00

 

사랑해요. 기약할 수 없는 영원을 입에 담고 싶을 만큼. 


.

.

.

수많은 논의가 있었다. 제이드가 근처 호텔을 잡아 들어간 뒤에도 네 여자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 릴리아는 중간중간 지루해했지만 - 결국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견설지는 수면 모드에 들어간 릴리아와 밀리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있는 클라라에게 다가갔다. 3인 가구용 매물로 올라왔던 집은 성인 4인에게는 살짝 비좁았다. 

"커피라니... 안 주무시게요? 애들 자는데 같이 주무시죠. 거실 소파에 이불 깔아뒀어요."

 

"아뇨. 내일도 할 일이 있으니 슬슬 잠들어야죠. 이건 커피가 아니라 레몬 밤이에요. 설지 씨도 한 잔 하실래요?"

 

차는 즐기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맞은편에 앉아 클라라가 건네는 컵을 받으며 뜸을 들이고, 따뜻해진 손잡이를 쓱 쓸어내리고는 입을 열었다.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요? 클라라는 어른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 앞에서 - 울고불고 하는 못난 꼴을 보였기에 - 의젓해 보이는 효과는 없겠지만, 그래도 진지한 마음으로 전하고 싶었다. 

 

"네.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죠. 여러분께서 릴리를 맡아주신다면 저는 안심이에요. 릴리도 두 분이 마음에 든 것 같고..." 

 

릴리아 카델은 한국에 남기로 했다. 제이드는 안드로이드 권리 단체의 한국 지부에 연락을 넣어 상담사를 연결해 주었고, 바로 일주일 뒤 첫 상담 치료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현재 삶에서 무료함을 느끼니, 아예 다른 환경에 있게 하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해도 돼? 클라라가 물어보면 릴리아는 무언가 길게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뜻 모를 미소를 띄운 채. 

 

"공짜로 맡아주는 거 아니니까 감사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돌봐주는 것도 대부분 밀리가 할 테고, 그 애가 없었으면 애초에 이런 일 하지 않았을 테니까."

 

퉁명한 말투였지만 잠든 밀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따스했다. 클라라는 그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감정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건 정말 큰 축복이라고. 자신은 인간이니 프로그래밍을 당했다는 의심은 하지 않았지만, 릴리아를 향한 사랑이 그저 자신의 이기심에 불과하지는 않을까 많이 고민했었다. 사랑은 자유롭게 풀어주는 거라던데, 매 순간 릴리아를 옭아매고 싶어 안달이 난 이것 또한 사랑일까 하고. 

 

"그래도요. 제 입장에서는 감사해야 하는 일이 맞으니까요. ...저한테도 필요할 것 같아요. 릴리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시간이."

 

견설지는 그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생각보다 견딜 만해요. 너무 우울하게 있진 마세요. 클라라는 밤의 장막에 숨은 태양신의 둘째 딸처럼 옅게 웃었다. 그리고 믿었다. 지금은 잠시 어두울 수 있지만, 열심히 헤쳐나가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밝은 빛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

 

.

 

.

 

시간이 흘러 클라라가 돌아갈 날이 다가왔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길게 한국에 머물렀으며, 덕분에 네 명의 여자들은 꽤나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자, 그만 울어. 작별 인사를 잘 해둬야 릴리아도 안심하지 않겠어? 설지는 클라라의 등을 탁탁 두드렸고, 그는 훌쩍이다 흡,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에 힘을 주었다. 숨을 참는다고 눈물이 멈추는 건... 어어, 클라라! 얼굴이 완전 빨개졌어요. 숨 그만 참아요! 밀리는 안절부절했으며 릴리아는 즐겁게 웃었다. 공격하려는 복어 같네. 클라라. 

 

"아. 안내방송 나온다. 이제 들어가야 하지 않아?"

 

안내말씀 드립니다. 시카고행 XX항공은 지금 2번 탑승구에서... 영어로 반복된 탑승 안내가 재차 울렸다. 클라라는 얼굴을 닦고 개운한 얼굴로 웃어보이려는 시도를 했다. 그 가상한 노력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못했다. 릴리아가 늘 하던 것처럼 팔을 벌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먼저 클라라를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설지와 밀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있지. 난 아직도 내가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널 사랑하지만, 그게 내 생을 연명해야겠다는 생각과 이어지지는 않아."

 

그래도 열심히 노력해 볼게. 삶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게, 살아서 널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힘낼게. 그 말을 들은 클라라는 울지 않았다. 그는 릴리아의 뒷통수를 가만히 감싸고, 사랑스러운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볼 때 다가가 입술을 겹쳤다. 헉. 설지가 밀리의 눈을 가리든 말든, 둘은 잠시 동안 그렇게 약속을 다졌다. 붉어진 뺨으로 멀어진 클라라는 씩 웃고는 캐리어를 밀며 멀어졌다. 배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설지, 있잖아요."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릴리아를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길에, 밀리는 설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응. 왜 그래? 운전 중임에도 다정하게 말해주는 그를 마주했다. 그게, 그러니까...  줄곧 준비해왔던 말을 꺼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은 처음 알았다.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견설지를 사랑하게 된 것만 같았다. 

 

"여행을 하는 동안 계속 생각했어요. 난 설지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곁에 있고 싶다면, 그건 어떤 감정에 의한 걸까."

 

일단, 내 감정이 무엇이든... 그건 진짜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왜냐고 물으면, 지금 내가 생생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에요. 설지는 인적이 드문 도로에 잠시 차를 세웠다. 밀리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만들어졌다고 해서 진짜가 아닌가요? 그럼 나 자체도 가짜인 거잖아요. 그건 싫어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안드로이드는 가짜'라고 말하더라도, 난 진짜인 나로 있을 거예요. 

 

"그건 지금을 살아가는 내가 정하고, 또 책임질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죠?"

 

설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으로는 부족해서 두어 번 격하게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밀리의 답이 긍정이길 바랐다. 지나처럼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어요.'라고 말해주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기대했었다. 그것이 산산히 부숴졌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항상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어 비범한 면모를 보여주는 사람.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을 눈 안에 가득 담았다. 

 

"응. 맞아. 너에 대한 것은, 너 이외에는 정할 수 없지. 그래서 계속 기다렸어."

 

설지는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걸 본 밀리는 역으로 조금 불만스러워졌다. 대답을 들은 양으로 차 시동을 키려고 하는 손을 멈추게 하고, 조수석에서 열심히 움직여 옆자리로 넘어갔다. 미, 밀리?! 잠깐만. 지금 이러면 위험해... 종종 멋대로 구는 사람에게는 참을 수 없이 귀여운 면이 있었다. 견설지가 아무리 인내심이 강하다고 한들, 알아서 품에 안겨오는 사랑스러운 여자아이를 거절할 만큼 냉정하지는 않았다. 

 

"아직 할 말이 남았거든요? 됐으니까 집중해서 들어봐요."

 

밀리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거세게 뛰는 인간의 심장소리와 조용한 자신의 고동을 하나로 더하면서, 자신이 내린 감정의 정의를 들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