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밀] 영원한 것

영원한 것 18

김다고다 2024. 11. 24. 17:47

 

나 또한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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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의 말은 옳았다. 첫날 그렇게 울고불고 했던 것이 머쓱할 정도로 클라라는 빠르게 괜찮아졌다. 어쩌면 수다스럽게 그 자리를 채워준 밀리가 있어서일지도, 이틀이라는 짧은 기한 덕분일지도 몰랐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그동안 클라라가 견고하게 가지고 있던 신념이 깨졌다는 점이다. 난 그냥 두려웠던 것 같아요. 릴리를 잃는다는 게. 퇴근 후 밀리를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려간 클라라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더욱 한 가지 길밖에 없는 것처럼 굴었죠. 잠시라도... 눈을 떼면 사라져 있을까 봐 매일 불안했어요. 그리고 결국 사라지고 말았네요."

 

"그랬네요. 대신 저를 남겨두고 갔죠. 그래서, 어떠세요? 릴리아 없이 지내본 하루의 소감은요."

 

클라라가 대답을 고민하는 동안 밀리는 버터로 익힌 관자 요리를 썰어 입에 넣었다.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대답이 돌아오면 꿀꺽 삼키고는 미소지었다. 그거 참 다행이네요. 그동안 마음 속에 쌓인 이야기를, 클라라는 요리가 식도록 내버려두고는 - 중간중간 밀리가 입에 넣어주긴 했다 -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릴리아는 나와의 삶에 미련이 없는 것 같아. 굳이 고칠 필요도 없고, 나아질 필요도 없다는 말에는 가슴이 너무 아팠어. 릴리아가 그걸 바란다면 들어줘야 하는 걸까? 원하는 삶을 살다가 죽을 수 있게? 아니, 안 돼. 절대 그렇게는 놔둘 수 없어. 릴리아를 위해서가 아니야. 나를 위해서... 아, 그래. 내가 그걸 견딜 수 없어. 오로지 나만.

 

"얼마 전, K사 안드로이드들이 보이는 삶에 대한 무망감과 몸체 손상 정도의 상관관계를 정리한 논문을 찾았어요. 그동안은 그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만 여겼었는데... 명확하고 공통된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조금 편해졌어요. 죄책감이 덜어진 것일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밀리와 밖에서 노는 일을 반대하지 않았고요."

 

이렇게 생각하니... 새삼, 정말 나쁜 동반자였네요. 클라라는 겸연쩍게 웃고는 미지근해진 파스타를 뒤늦게 돌돌 말았다. 무르익은 적기를 놓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그 시기가 지나가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클라라의 장점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가 용기 낸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게 해 주고 싶었다. 견설지와는 조금 다르지만, 클라라에게도 그런 식의 애정을 느끼기 시작한 밀리는 미소지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입을 열어 그가 편히 배를 채울 수 있도록 해 줄 차례였다. 

 

"부정하지는 않을게요. 하지만 클라라도 많이 노력한 바 있잖아요? 지금부터 함께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볼 거고요. ...클라라의 생각이 어떨진 모르겠지만, 난 안드로이드가 살아있다고 여겨요.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마음을 의심하고, 그 사실마저 거듭 돌이켜 보곤 하니까요. 설령 그 모든 것조차 프로그래밍의 일부라고 해도, 우리는 사유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릴리아와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겠죠."

 

접시를 깔끔히 비운 클라라는 방긋 웃었다. 오랜만에 거리낄 것 없이 웃는 것 같았고, 마음 답답할 일 없이 식사를 마친 것 같았다. 과연 밀리는 사람의 마음을 풀어내고 편안하게 해 주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이젠 릴리가 필요 없다 이거지? 잔재해 있는 자기혐오가 고개를 들이밀거든 손을 휘휘 저어 쫒아냈다.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는 있지만, 한순간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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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아의 말은 하나같이 속을 긁는 것들 뿐이었다. 그럼 이제 집으로 갈까? 오랜 시간 비행하는 건 처음이라 지쳤어. 순진한 밀리를 냅다 꼬셔서 - 견설지의 표현에 의하면 - 이역만리 타국에 남게 한 주제에 뻔뻔했고, 여기가 당신과 밀리가 살던 집이야? 작지만 아기자기한 곳이네. 아, 옷부터 좀 갈아입을게. 이 방이 제일 넓네~ 성질을 눌러가며 데려왔더니만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견설지가 안드로이드에게 친절한 건 밀리 때문이었으므로, 밀리를 돌아오지 못하게 만든 릴리아에게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기, 호텔방이라도 잡은 듯 굴지 말아주겠어? 밀리의 부탁이 있어서 데려왔지만, 난 여전히 이걸 황당한 요구라고 생각해. 대체..."

 

"밀리랑 찍은 사진 볼래? 아주 귀여워. 내가 머리도 묶어주고 화관도 씌워줬지~"

 

꽁꽁 냉동시키려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어디 보여줘 봐. 과연 릴리아는 제멋대로 굴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능력이 있었다. 그렇게 견설지는 릴리아와 함께 사진을 보고, 감탄하고, 밀리의 귀여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맞아. 이렇게나 화려하게 생겼는데도 전혀 과하다는 느낌이 안 나잖아. 놀라울 정도로 사랑스럽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아까 덮어둔 닭볶음탕을 데워 릴리아의 앞에 내려놓고 있었다. 

 

"와, 먹음직스러워라. 포크와 나이프를 써도 될까? 젓가락로 살을 바르는 게 좀 어려워."

 

"... ...정말 못 살겠네. 자, 내가 발라서 밥 위에 얹어줄게. 그냥 먹기만 해."

 

낯을 가린다는 개념도 없는 건지, 릴리아는 밥 위에 얹어진 살코기를 잘도 받아먹었다. 너도 좀 먹지그래? 고기를 입 안에 쏙 넣어주기도 하고, 맛있다. 더 줘. 손에 들려있는 걸 직접 받아먹기도 했다. 이쯤 되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밀리의 일기에 적혀있던 내용, 클라라라는 사람이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엉엉 울었던 이유. 저절로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네. 세간에선 이런 걸 요물이라고 하는데. 

 

"그나저나... 정말 주인한테 연락 안 해 볼 거야? 휴대폰 빌려줄 수 있다니까." 

 

"됐어. 지금쯤 밀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견설지의 머리카락이 삐쭉 서면 즐거운 듯 웃었다. 그를 놀리고자 한 말은 맞지만, 동시에 진심이었다. 릴리아는 진심으로 클라라가 자신 없이도 행복해지는 법을 알았으면 했다. 하지만 동시에, 정말 잘 지내기만 하는 걸 바라지도 않았다. 살아있고 생각한다는 건 이토록 어려워서, 동시에 두 가지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릴리아는 이곳에서  어느 쪽 마음을 우선시할지 결정해야만 했다. 

 

"이틀 뒤에 만나러 오잖아. 그 때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지.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