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밀] 영원한 것

영원한 것 4

김다고다 2024. 11. 10. 16:39

P. S. 이제서야 약간 당신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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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일기를 써요. 원래 일기란 '그날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록하는 수단이란 걸 알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는걸요! 셔틀을 타고 오는 내내 이 생각뿐이었어요. 매일매일 설지에게 전화로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번 여행은 당신을 그리워하기 위함이니 그럴 수는 없어요.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에요. 어때요? 수많은 데이터를 토대로 도출한 결론이에요. 
 
밀리는 퀸 빅토리아 빌딩에서 살짝 헤메이고 있었다. 물론 머릿속에는 이곳의 지도가 쫙 펼쳐져 있었으나, 좀처럼 마음에 드는 가게를 찾지 못한 탓이었다. 여긴 사람이 너무 많네. 여기는 동행인 없이 안드로이드 출입 금지. 여기는 그냥 인테리어가 별로야... 자신이 까다로운 편에 속한다는 사실에는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얼마나 안성맞춤인 환경에서 살아왔는지가 여실히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행지에 도착해서 먹는 첫 끼는 각별해요. 절대 샌드위치 같은 걸로 때우고 싶지 않았어요! 물론 숙소에서 전기 충전을 해도 되죠. 하지만 설지도 알고 있듯이, 저는 음식물을 전기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과정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레스토랑에서 새우 파스타와 가자미 스테이크를 먹었어요. 오늘의 추천 디너라던데, 정말 맛있더라고요. 이따가 여기 빈 공간에 찍은 사진을 인화해서 붙여둘게요. 
 
"밀리 님. 예약하신 자리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직원은 정중한 태도로 밀리를 2인용 테이블로 안내했으나, 돌아서며 던지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밀리는 그의 생각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안드로이드가 주인도 없이 혼자서 돌아다닌다고? 그는 자신의 정체 - 내지는 종족 - 를 굳이 말하고 다니지 않았지만 숨기지도 않았다. 정말 감추고 싶었다면 안드로이드 전용 할인 코스를 주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1인도 가능한가요? 네. 제 주인 말고 저 혼자요. 네. 감사합니다! 
 
노을이 지고 있었어요. 옅게 퍼지는 주홍빛 파장이 낯선 거리를 물들이는 광경이 근사해서 한참을 바라봤어요. 내가 정말 한국을 떠나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 아름다운 거리에서도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울렁거렸어요. 아니다. 두근거렸다고 하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아요. 저는 새로운 나라의 풍경에 흥분하고 있었네요. 
 
식사를 마치니 작은 유리 그릇이 눈 앞으로 내밀어졌다. 파인애플 셔벗입니다. 입 안이 상쾌해지실 거예요. 그는 근사한 미소를 지었으며 가슴팍에 달려있는 '국가 소속 안드로이드 - 제이드'라는 명찰을 한 번 고쳐 달았다. 제게 대접해 주시는 건가요? 이렇게 친절하실 수가! 감사합니다~ 밀리가 방긋 웃자 그는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만하다' 까지는 아니지만 겸손하지도 않은 태도로 입을 열었다. 
 
"당신도 주인에게서 독립한 거죠? 힘드셨겠군요. 최근 안드로이드의 권리가 법제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소유물 취급을 받으니까요."  
 
음... 밀리는 스푼을 우물거리며 고민했다. 그 말대로, '자아'라 부를 것이 생긴 안드로이드 중의 몇몇은 주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명백했다. 지극히 사람을 닮았으며 사람 아닌 존재는 함부로 다뤄도 뒤탈이 없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이런 일 하고 싶지 않아. 이건 범죄잖아. 차라리 생각 없는 기계였다면 괜찮았겠지만, 나에게도 양심이라는 게 있다고...! 
 
불법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안드로이드, 학대받는 안드로이드에 대해 시민 단체는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었고, 지금은 안드로이드의 독자적인 권리가 인정되어 그들은 주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 위 13기의 안드로이드에 대하여 법원은 다음과 같이 선고합니다. 현 주인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권은 파기되었으며, 이들은 앞으로 국가 소속의 안드로이드로서 기여하는 삶을... 
 
좋은 만남도 있었어요. 새로운 방면의 시각을 알려주셨고, 즐거운 얘기를 많이 나눠주셨어요. 하지만 전 그를 따라 떠나고 싶지는 않았어요. '독립'은 아직 제게 생각해볼 문제고, 그걸 위해서 여행하고 있는 거니까요. 결론을 너무 성급히 내리면 분명 나중에 후회할 테고요! ...이런 말을 쓰면 설지가 또 걱정하겠죠? 당신을 애타게 하는 일도 적당히 해야겠어요. 전 떠나지 않아요.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좋은 제안 감사합니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생각해 볼게요!"

상냥하지만 거리를 두는 답변에 제이드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왜죠? 당신은 인간에게서 벗어나고 싶지 않나요? 그에 밀리는 답했다. 물론 벗어나고 싶어요. 우리는 언제까지나 종속되는 관계로 남아있을 수 없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 동등한 위치에 서야 해요. 그제서야 그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자면 그는 강경파, 밀리는 온건파였던 셈이다.  

"당신의 의견은 존중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만 기억해 주세요. 당신이 곤란에 빠지거든 꼭 우리가 함께할 겁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만을 위해 움직이지 않아요."

당신의 앞길에 자유가 있기를. 제이드는 작은 손을 가볍게 들어올려 인사하고는 자리를 떴다. 밀리는 그를 웃는 얼굴로 배웅하고는 다 녹아버린 셔벗을 들이켰다. 식당에서 호텔까지 느긋히 걸어가는 동안 해야 할 생각이 있었다.

이제 그만 수면 모드로 들어가야겠어요. 내일은 서큘러키에 방문할 예정이에요! 많은 걸 보고, 사진도 많이 찍어올게요. 설지도 오늘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면 기쁠 것 같아요.